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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이야기

단원구 유래

단원구의 구(區)이름 유래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를 1991년 11월 문화관광부에서 이달의 문화인물로 지정한 것을 계기로,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안산에 거주하던 시절 김홍도가 7~8세의 나이에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표암유고)이 발표되면서 김홍도가 안산에 살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학설에 따라 안산을 김홍도의 출생지로 추정하고, 김홍도가 유년시절부터 안산에서 그림활동을 시작하였음이 확실함에 따라 단원의 예술정신을 발전시켜 안산문화예술의 꽃을 피우고자 하는 의미에서 2002년 11월 1일 김홍도의 호를 따 ‘단원구’라고 명명하였다.

- 고잔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 고잔동, 중앙동, 호수동이 속해있다. -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잉화면(仍火面) 고잔리(古棧里)였다가 한말에는 인화면(仁化面) 고잔리가 되었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일제에 의해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강제로 통합되었고, 4월 1일 인화면이 수암면(秀岩面)에 통합 ․ 개칭되어 시흥군 수암면 고잔리로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의거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고잔동(古棧洞)으로 되었다. 고잔동은 안산시청을 비롯하여 행정·교육·금융 등 안산시의 중심지이다. 곶(串)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곶안’이 연음되어 ‘고잔(古棧)’이 된 것이다.
- 선부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 선부1동, 선부2동, 선부3동이 속해있다. -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大月面) 선부리(仙府里)와 달산리(達山里)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始興郡 君子面 仙府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선부동(仙府洞)이 되었다. 선부동은 ‘선녀들이 놀다간 선녀골’이라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선부동은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산대장)가 섰을 만큼 북적대던 곳이었다. 특히 안산의 관적성씨 중 안산 김씨 후손 중에 김맹전(金孟銓 : 사재감정 역임)의 묘를 석수골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안산에 안산 김씨의 뿌리를 내렸다 한다. 또한 이곳은 안산의 인맥 중 가장 번성했던 파평 윤씨 소정공파 후손들의 주세거지이기도 하다.
- 성곡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초지동 관할이다 -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와리면(瓦里面) 성두리(城頭里)와 무곡리(茂谷里)였다가, 1912년 2월 5일 성두리와 무곡리를 통합해 성곡리(城谷里)로 개칭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으며, 4월 1일 와리면이 군자면(君子面)으로 통합․개칭되어 시흥군 군자면 성곡리로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따라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성곡동(城谷洞)이 되었다.
성곡동은 성두리의 ‘성(城)’자와 무곡리의 ‘곡(谷)’자를 취한 것이다. 성두리는 잿머리[城頭]라 하여 골우물·벌말·안말·도란말을 총칭하는데, 도란말에는 삼국시대 성터로 추정되는 성곡동 성터가 남아 있고, 그 안에는 주민들이 대대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잿머리 성황당이 있다. 안산에 전래되던 동제 대부분은 폐동과 함께 사라졌지만 이곳 동제(성황제)는 폐동 후에도 매년 음력 10월 초에 전국 각처로 흩어졌던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제를 지낸다.
무곡리는 무들[茂谷]이라 하여 장가물·장자골·느티나무재를 포함하는데, 이들 마을은 신도시건설 때 모두 폐동되어 현재는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 신길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도 신길동이다. -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와리면(瓦里面) 신각리(新角里)․적길리(赤吉里)․선곡리(船谷里)․성내리(城內里)였다가, 1912년 2월 5일 이들을 통합해 신길리(新吉里)로 개칭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으며, 4월 1일 와리면이 군자면(君子面)으로 통합․개칭되어 시흥군 군자면 신길리로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따라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신길동(新吉洞)이 되었다.
신길동은 신각리(新角里)의 ‘신(新)’자와 적길리(赤吉里)의 ‘길(吉)’자를 취한 것으로, 신도시개발로 폐동 후에는 공장들이 들어섰고, 조선시대 임금께 밴댕이[蘇魚]를 진상하던 ‘사옹원분원(司饔院分院)’터와, 조선 초기에 설치된 ‘무응고리 봉화 터’ 등도 보존되지 못하고 유실되었다.
- 와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도 와동이다. -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잉화면(仍火面) 와상리(瓦上里)와 와하리(瓦下里)였다가 조선 말기 인화면(仁化面) 와상리와 와하리가 되었다. 1912년 2월 5일 와상리와 와하리를 통합해 와리(瓦里)로 개칭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으며, 4월 1일 인화면이 수암면(秀岩面)으로 통합․개칭되어 시흥군 수암면 와리로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따라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와동(瓦洞)이 되었다.
와동은 기와를 굽던 기와골[瓦谷]에서 유래되었고, 신도시개발로 자연취락이 모두 폐동되어 대부분의 지역이 택지로 조성되었다.
- 원곡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 원곡동, 백운동이 속해있다. -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와리면(瓦里面) 원당상리(元堂上里)였다가 조선 말기 원상리(元上里)가 되었다. 모곡리(茅谷里)는 조선 말기에 처음 보이는데, 1912년 2월 5일 원상리와 모곡리를 합쳐 원곡리(元谷里)라 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4월 1일 시흥군(始興郡) 군자면(君子面) 원곡리(元谷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법률 제3798호에 의거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원곡동(元谷洞)으로 되었다.
원곡동은 원상리(元上里)의 ‘원(元)’자와 모곡리(茅谷里)의 ‘곡(谷)’자를 취한 것이며, 신도시개발 후 취락이 폐동되자 원주민을 위한 이주단지가 조성되어 비교적 원주민이 많이 살고 있다. 또한 이주노동자를 위한 국경 없는 마을이 조성되어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생활하는 지역이다.
- 원시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초지동 관할이다. -
조선시대의 안산군 와리면 원하리(元下里)와 시우동(時雨洞)이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시흥군 군자면 원시리(元時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원시동(安山市 元時洞)이 되었다.
원시동은 원하리(元下里 ; 범직이)의 ‘원(元)’자와 시우동(時雨洞 ; 시꿀)의 ‘시(時)’자를 취한 것으로, 예전 군자면 관내에서는 부촌(富村)이었다. 또한 이곳은 기독교가 첫 전래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근의 목내동·성곡동과 함께 예전의 집들은 모두 헐려, 현재는 반월산업단지의 중심지로 변모되었다.
- 초지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도 초지동이다. -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와리면(瓦里面) 초지리(草芝里 : 또는 초지동<草芝洞>)와 포촌리(浦村里 : 후에 원당포<元堂浦>)였다가 1912년 2월 5일 초지동과 원당포를 합쳐 초지리(草芝里)라 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고, 4월 1일 와리면이 군자면(君子面)에 통합․개칭되어 시흥군 군자면 초지리가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따라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초지동(草芝洞)이 되었다.
조선 초에 초지량영(草芝梁營)을 설치하면서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배치하였다가 효종 7년(1656)에 초지량영이 강화도로 이전되었다. 초지량영의 근처에 있던 마을이라 그 이름을 따서 초지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초지동에는 포구인 원당포(元堂浦)가 있어 일찍이 어업이 번성했던 곳이나 신도시개발로 대부분의 마을이 폐동되어 반월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일부는 택지로 조성되어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 풍도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대부동 관할이다. -
① 풍도
풍도(豊島)는 고려~조선 말까지는 ‘단풍나무 풍(楓)’자를 써서 ‘楓島’로 표기했으나 1909년 대부면의 하부 행정리가 되면서 ‘豊島’로 표기되었다. 농토가 없고 섬 근해어장에 해산물이 풍족치 않아 풍도 사람들은 섬 이름을 ‘풍년 풍(豊)’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풍도는 섬 전체가 활엽수로 덮혀 있고 특히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섬 전체가 단풍으로 붉게 물든다.
② 육도(六島)
끝눅섬[末六島], 가운데눅섬[終六島], 육섬[六島], 질마섬(中六島), 정초리 섬(尾六島), 물우녀 등 여섯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 화정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선부3동 관할이다. -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仍火面) 화정리(花井里)와 광곡리(廣谷里)였다가 조선 말기 인화면(仁化面) 화정리와 광곡리가 되었다. 1912년 2월 5일 화정리와 광곡리를 통합해 화정리가 되었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으며, 4월 1일 인화면이 수암면(秀岩面)으로 통합․개칭되어 시흥군 수암면 화정리가 되었다. 그 후 법률 제4050호에 의거 1989년 1월 1일 시흥시로 승격하면서 시흥시 화정동(花井洞)으로 되었다가,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거 1995년 4월 20일 안산시로 편입되어 안산시 화정동이 되었다.
이 마을은 풍수로 보아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인데, 마을 앞(화정영어마을 앞)에 있는 큰 우물에서 아주 오랜 옛날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하여 이 우물을 ‘꽃우물[花井]’이라 하였다. 마을 이름도 ‘꽃우물’을 발음나는대로 연음화(連音化) 되어 고주물[花井]이라 부른다.

대부도(大阜島)

대부도는 시청이 있는 안산에서 서쪽으로 약 35.3㎞ 떨어진 해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 서신동, 시흥시 정왕동(오이도)과 방조제로 연결되어 있다. 동경 126°22′, 북위 37°04′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 40.93㎦, 해안선 길이 61㎞이고 부속 유인도로 탄도(炭島), 불도(佛島), 선감도(仙甘島), 풍도(豊島), 육도(六島)가 있다. 삼국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주(漢州)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소속이었으며 조선시대에 남양군(南陽郡)에 속하였다. 인조(仁祖)때에는 방어사(防禦使)가 주재하였으며 1914년 남양군에서 부천군(富川郡)으로 편입되었고, 1973년 행정구역 개편(법률 제2597호)으로 옹진군(甕津郡)에 편입되었다가 1994년 12월 26일 행정구역 개편(대통령령 제 14,424호)으로 안산시에 편입되었다.

화성시 서신에서 탄도까지의 0.853㎞의 방조제(공사기간 1987년 10월~1988년 4월), 탄도에서 불도까지의 0.180㎞의 방조제(공사기간 1987년 10월~1988년 4월), 불도에서 선감도까지의 0.290㎞의 방조제 (1988년 2월~1988년 2월)가 완공되었고, 시흥시 오이도와 대부도 방아머리를 연결하는 11.206㎞ 방조제(공사기간 1988년 4월~1994년 1월)의 준공으로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시화호가 생겨났다.

남양도호부 시절 남양쪽에서 대부도를 바라보면 섬같지 않고 큰 언덕처럼 보인다고 하여 대부도라고 불렀으며 다음과 같이 별도로 불려지던 땅이름이 있다.

연화부수지(蓮花浮水地)
섬의 형태가 마치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명당을 뜻하는 것으로 인재가 많이 배출될 형상이라고 한다.
낙지섬
섬의 형태가 큰 낙지가 팔방으로 발을 벌리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황금산(黃金山)이 낙지의 머리이고 낮은 산줄기들은 낙지의 발과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죽호(竹湖)
호수처럼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대부도는 서해 훈풍의 영향과 토질이 비옥하여 대나무가 잘 자란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부도(大部島)와 대부도(大府島)
큰 섬을 뜻하며 여러섬을 다스리는 뜻이 있다. 섬중의 중심섬이라는 뜻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후기까지 불린 땅이름이다.
대부도(大富島)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고 해산물이 풍부하므로 부유한 섬이라는 뜻이다.
- 대부남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대부동 관할이다. -
대부남동은 대부도(大阜島)의 남쪽에 위치한다. 대부도는 삼국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하였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한주(漢州)에 속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소속이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남양(南陽) 소속이었다. 1709년(숙종 35) 대부도에 진(鎭)이 설치되어 대부첨사가 관할하기도 하였으나 1895년(고종 32)에 대부진(大阜鎭)이 혁파될 때까지 존폐를 거듭하였다.
대부도는 조선 후기 면리제가 실시된 이후 대부면이 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 1914년 3월 1일 남양군(南陽郡)에서 부천군(富川郡)으로 이관되었고, 1917년 6월 20일 경기도고시 제28호에 의해 대부면은 동리․남리․북리․ 선감리․풍도리로 편제되었는데, 남리(南里)는 흘곶동(訖串洞)과 상동(上洞) 일부 지역이 합쳐진 것이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법률 제2597호)으로 대부면이 옹진군(甕津郡)에 편입되었으며, 1994년 12월 26일 다시 행정구역 개편(대통령령 제14434호)으로 안산시에 편입될 때 대부면 남리가 대부남동(大阜南洞)이 되었다.
- 대부동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대부동 관할이다. -
대부동동은 대부도(大阜島)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대부도는 삼국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하였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한주(漢州)에 속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소속이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남양(南陽) 소속이었다. 1709년(숙종 35) 대부도에 진(鎭)이 설치되어 대부첨사가 관할하기도 하였으나 1895년(고종 32)에 대부진(大阜鎭)이 혁파될 때까지 존폐를 거듭하였다.
대부도는 조선 후기 면리제가 실시된 이후 대부면이 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 1914년 3월 1일 남양군(南陽郡)에서 부천군(富川郡)으로 이관되었고, 1917년 6월 20일 경기도고시 제28호에 의해 대부면은 동리․남리․북리․선감리․풍도리로 편제되었는데, 동리(東里)는 영전동(營田洞)과 하동(下洞) 일부 지역이 합쳐진 것이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법률 제2597호)으로 대부면이 옹진군(甕津郡)에 편입되었으며, 1994년 12월 26일 다시 행정구역 개편(대통령령 제14434호)으로 안산시에 편입될 때 대부면 동리가 대부동동(大阜東洞)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대부면사무소는 하동(下洞)에 있다가 1934년 상동(上洞)으로 신축 이전하여 1982년 신청사가 마련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다.
- 대부북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대부동 관할이다. -
대부북동은 대부도의 서북쪽에 위치한다. 전 근대시대 남양(南陽)에 속했던 대부도는 1914년 3월 1일 남양군(南陽郡)에서 부천군(富川郡)으로 이관되었고, 1917년 6월 20일 경기도고시 제28호에 의해 대부면은 동리․남리․북리․선감리․풍도리로 편제되었는데, 북리(北里)는 종현동(鍾懸洞)과 상동(上洞) 일부 지역이 합쳐진 것이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법률 제2597호)으로 대부면이 옹진군(甕津郡)에 편입되었으며, 1994년 12월 26일 다시 행정구역 개편(대통령령 제14434호)으로 안산시에 편입될 때 대부면 북리가 대부북동(大阜北洞)이 되었다.
-목내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초지동 관할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와리면(瓦里面) 이목리(梨木里)와 능내리(陵內里)였다가, 1912년 2월 5일 두 마을을 합치면서 이목리의 목자와 능내리의 내자를 따서 목내리(木內里)라 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고, 4월 1일 와리면이 군자면(君子面)으로 통합․개칭되어 시흥군 군자면 목내리가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따라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목내동(木內洞)으로 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조선 초기 비운의 임금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묘를 능안에 쓴 후부터 널리 알려졌다.
- 선감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대부동 관할이다. -
① 선감도
선감도는 고려시대부터 선감미도(仙甘彌島)로 표기되어 왔다(<고려사(高麗史)>). 1913년 남양군이었던 대부면을 부천군으로 편입할 당시 불도와 탄도를 합하여 선감1리로 하였다가 1961년 법정리를 행정리로 분할하면서 선감도를 선감 1리, 불도·탄도를 선감2리로 하였다.
선감도는 옛날에 속세를 떠나 선경(仙境)에 살면서 구름과 학을 벗하여 불로장생(不老長生)하고 신변자재(身變自在)를 한다는 신선(神仙)이 이곳에 내려와 맑은 물로 목욕을 했다 하여 선감도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선감도 높은 산 위에 정결한 바위가 있어 이 바위에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 하여 선암도(仙岩島)라 했으나 후에 선감도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홍다구(洪茶丘)는 고려인으로 원(元)나라에 귀화하여 고국인 고려를 제압하고 김방경(金方慶)과 더불어 삼별초를 평정하였다. 그후 그는 원나라의 일본 정벌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고향인 남양으로 돌아와 선감도에서 일본 정벌에 필요한 배를 지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섬의 이름을 선감이(船監吏) 또는 선감도(船監島)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고려 패망 후 왕씨들이 이곳에 숨어 살았다고 하며, 왕씨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폐묘가 남아 있다.
② 불도
19세기 중반 간행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誌)>에 처음으로 불도(佛島)의 기록이 보인다. 옛날 어느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던 중 그물에 조그만 부처가 걸려 나와 그 부처를 자기 집으로 가져와 불당을 만들어 모셔 놓고 정성을 드렸는데, 당시 불당이 있던 곳을 불접리(佛接里), 섬 이름을 불도라 하였다 한다. 섬의 지세는 지네 형국이다.
③ 탄도
탄도(炭島)는 지금도 ‘숯무루’라고 불리고 있다. 옛날 이곳이 무인도일 때 이 섬의 울창한 수목을 베어 숯을 구웠다.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편을 보면 이곳을 탄모도(炭毛島)라고 기록하였고, 1861년 간행된 <대동지지>에도 역시 탄모도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1871년경에 작성된 <대부도지도>에는 탄매도(炭埋島)로 적혀 있다.